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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할 이유

*극히 일부 글 내용을 발췌함.

바로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다.

재밌게도 나는 이 고통의 순간을 겪고,
밤마다 할머니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고치기 위한 미소 연습을 하면서 세상의 진리를 하나 깨달았다.

바로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다.
아무리 비명 소리가 누군가의 인생과 영혼을 찢어두고 있어도, 나처럼 수천 명의 구독자라도 없는 사람은 그런 고충을 이야기한들
읽어주는 사람은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끔찍한 세상. 그곳이 이곳이다.

'은혜'를 받은 나는 무척이나 기뻐서 학교에서도 웃고 다니고, 집에서도 웃고 다녔다.

'하나님은 너를 통해서 하고자 하실 일이 있어서 너를 이 땅에 보내셨다.' '너는 사랑받는 존재다.' 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황당한 이야기겠지만 그 시절 나에겐 유일한 희망의 메시지였다.
매일매일이 삶을 끝낼 날과 방식만을 고민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 '너는 사랑받는 존재야.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만드신 거야.'라고 이야기해 준다니
사람이 말 한마디에 죽음에서도 용기를 얻는다고 그 시절 나는 교회를 통해서 분명 힘을 얻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나는 무척이나 기뻐서 학교에서도 웃고 다니고, 집에서도 웃고 다녔다.

그리고 전도도 하고 교회도 같이 가자고 하곤 했다.

친구들이 나를 이상하게 말하기도 했다. "부흥회 끝나고 나서 좀 변했어." 그렇다. 변했었다.
부흥회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부분 울고 불고, 회개하고 난리도 아니다. 나라를 판 대역 죄인들이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후회하는 모습에 가깝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교회 다니던 학교 친구들도 그랬지만 다들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부모님도 부흥회 때나 기도를 열심히 할 뿐 돌아와선 똑같아졌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한테는 부흥회는 그저 이벤트였다. 콘서트나 뮤지컬 같은 이벤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응급실에 가서 진단을 받으니 기흉이었다. 폐의 일정 부분이 터진 것이다.

응급실에 가서 진단을 받으니 기흉이었다. 폐의 일정 부분이 터진 것이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하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 전날 밤 늦게까지 코비 브라이언트의 훈련을 따라한다고 밤 10시까지 농구를 연습을 했다.
오후 6시쯤부터 시작한 연습은 오후 10시가 될 때쯤에 500개의 공을 성공시켰고,
지친 몸으로 집에 와서도 넘치는 아드레날린으로 새벽 3시까지 잠을 자지 않고 보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기흉 수술을 바로 해야했고,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병원에서 보름 가까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대학생 1학년 - 테크리뷰 커뮤니티 서비스

- ( 긱뉴스와 같은 느낌, 논문 뉴스 중 공유할만한 콘텐츠를 큐레이팅 해서 보여주는 페이지다. ) 
- 광고비 20만원을 태워 홍보 > 구독자 며칠만에 몇천 도달
- 사람을 끌어모으는 프로세스 리스소를 모두 고려해야 함.
- 콘텐츠, 마켓팅, 지속성, 비용 등등

대학생 2학년

내가 활동했던 선교회 형제들 중에는 많은 형제들이 의류 브랜드 회사에 재직 중이었다.  
한 형제님이 의류 회사 대표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형들에게 연락해 옷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몇몇 형들이 회사로 나를 초대해서 이 시장의 시스템을 설명해주었다.
티셔츠를 제작할 때 사용되는 원단과 원단을 확보할 때 어떻게 하는지,
스튜디오에서 촬영은 어떻게 하는지,
촬영한 옷의 누끼는 어떻게 따는지 등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군생활:에어데스크

개발자는 코딩 뿐 아니라, MBA, PO, Merketing, Sales 역량도 필요하다.

나는 스타트업 전략과 기업 경영과 기획에 대한 공부에 몰입했다.  
아무리 제품이 좋고 기능이 많아도,
사람들이 사용법을 모르고,
이 제품이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필요없다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사업에서 내가 몰랐던 또 한가지를 이때 배웠던 것이다.

나는 CTO로 일하면서도 여러 기업에서 이직 제안을 받곤 했다.

블로그 포스팅으로 CTO자리로

동시에 에어데스크를 만들며 적었던 세상이 보지 않던 무관심했던 기록들을 누군가는 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CTO로 일하면서도 여러 기업에서 이직 제안을 받곤 했다.
유명한 기업의 C레벨 임원 분들이나 대표님들이 직접 이메일을 보내오거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쪽지를 보내시기도 했다.

방송에서 사용할 주식 게임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

포트폴리오는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해야 한다.

나는 SBS의 ‘그것이알고싶다’ 팀에서 내가 과거에 만들었던 ‘월스트리트 블록딜'을 보고, 
방송에서 사용할 주식 게임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끝날 때쯤이었다.

남들이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주는 일. 그리고 개발자이자 사업가로서 함께 고민하는 일.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의 외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는 점점 더 많은 외주를 받게 됐다.
외주의 금액은 커져갔고, 내 하루는 점점 더 바빠졌다.

직장인보다 수익이 높은 프리랜서

직장인 보다 프리랜서 길을 선택

이제는 대부분의 직장인보다 수익이 높은 프리랜서가 된 것이다. 
물론 프리랜서는 고정적인 일이 아니니 한철 장사이긴 했지만 일이 계속 들어오다보니 점점 거절하게 되는 상황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나는 한가지 제안과 한가지 결심을 하게 됐다. 그때 받은 제안이 유명한 온라인 강의 플랫폼에서 풀스택 강의를 해달라는 제의였고,
그때 결심했던 것은 평생 미뤄둔 숙제인 ‘양악 수술'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번 돈을 모두 모아 양악수술을 알아보고 바로 진행을 결정했다.

강의 촬영을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진행했어야 했다. 만 29살의 나이에 양악 수술을 한다고 하니 부모님은 깜짝 놀라셨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하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하며 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본격적으로 외주를 하기 시작하자 전국의 사업가들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빠르게 연락이 오던 사람들은 불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일은 특수성이 있었다.
애초에 대금을 보낼 때 본인들의 통장으로 거래를 하기 보다는 대포 통장을 쓰거나 현금 거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금 지불도 그랬다. 무기명 수표를 받아주냐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서를 할 수 없는 수표였다

어둠의 프로그래머들

불법적인 일은 가담하면 안된다.

세상에 불법적인 일들이 얼마나 거대한 사업인지 체감했다.  
보통 개발 용역 계약을 할 때, 외주 개발 계약을 할 때 오고가는 금액대와 그들이 논하는 금액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마치 어둠의 거래상처럼 그 세계에서만 활동하는 프로그래머들이 있었다.
재밌게도 그쪽 세계의 프로그래머, 개발자는 약속을 어기고 도망다니거나 그들의 중요한 자료를 가지고 도망가는 경우도 많았다.
웃기는 현실이지만 서로 속고 속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의리’라는 추상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플렉스웹

개인 외주에서 개발사로

나는 그런 요청들도 받았지만 실제론 그보다 더 많은 정상적인 외주 요청을 받았다.  
플랫폼 개발부터 단순한 웹사이트 등의 외주 물량이 점점 많아지자 조심스럽게 사업을 키워보기로 결심했다.
사무실을 구하고, 채용 공고를 올렸다. 그렇게 시작한 회사가 플렉스웹이었다.

직원을 고용해서 일을 주고, 내 시간을 아낄 수 있다면 외주 회사는 잘 굴러갈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은 이 시스템이 확장되기 어렵다.

첫째는 마케팅이 쉽지 않고, 두번째는 고용한 직원이 충분한 생산성을 만들어낼지도 미지수이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수년간의 온라인 상의 활동으로 인해 나에게 일을 맡겨보고자 하는 고객들이 많았다.
그렇게 일을 하나하나 하면서 우리 회사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 자신에게 맡겨진 일만 하고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고하는 직원들
- 몇달을 기다려도 실력이 올라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회사 내 분열을 야기하는 직원이었다.

NFT 외주

재빠른 기술 습득 및 비즈니스 모델 편입

2021년 개발 시장에서는 급속도로 커지는 시장이 있었는데 바로 NFT였다.  
과거 2017년도, 그리고 2020년도의 불장을 이어서 2021년에는 NFT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NFT 시장은 개발사 입장에서 비교적 코드의 재사용이 많았기에 비용을 절감할 여지가 있었고, 수요도 많았다.
그렇게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나는 블록체인에 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디자이너에게 NFT 디자인을 맡기고 자체적으로 NFT 발행을 해보는 절차를 밟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사업을 준비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회사는 여러 NFT 기업들과 빠르게 협업을 하게 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게 꼬였다. 바로 금리 인상 + 테라 루나 사태 + FTX 사태 + 우크라이나 사태였다.
* 고객사의 파산으로 인한 계약 중단
* 우리 쪽 실수가 섞인 미수금이었다. 분쟁적 미수금

살아야 할 이유

에어데스크를 2년간 개발 등의 혼자만의 서비스 개발 및 이러한 이력들을 블로그에 남기면서 CTO제안이 많이 왔다.  

사업을 하다보면 온갖 형태의 일들에 휘말리곤 한다. 그들 중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들이 툭하면 변호사 불러서 한 판 붙자는 이들이다.
협박이 일상화된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모든 대화를 녹취해두고, 편리한 부분을 잘라서 저장해두고, 말을 바꾸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계약서에 두고.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렇게 내 신용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틀어막는 동안 거래하는 회사들은 파산을 하고, 배째라는 곳들이 나타나고,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감탄고토 하듯 필요할 때는 사용하고 단물이 나오지 않으니 뱉어버리는 상황은 너무도 많았다.
끔찍하리만치 일관된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내 모든걸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무얼 위해서 살아온 것이었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보면 나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만 29살에 나는 한 달에 3천만원을 벌던 사람이었다.
많이 벌던 날에는 하루에 500만원 이상을 벌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몇가지 더 있다.
정확히는 내가 보답해야할 사람들이 내 인생에 남아있다.
부모님 이외에도 내 삶에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나는 큰 꿈을 가지고 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 사람들 각각에게 주고 싶은 선물들이 있다.
그 분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지금 나의 꿈이자 살아야 할 이유이다

액션)살아야 할 이유

  • 지금 당장 살아야 할 이유를 고민하자.
  •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
  • 중간에 바뀔 수 도 있다.
  • 그 이유는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 대신 그 이유에 대해 전심 해야 한다.